'2026/07'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6.07.29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신작 단편을 1주일간 공개합니다. 드래그와 우클릭을 막았지만, 우회가 가능하더라도 복사 및 전제는 불허합니다.

 

 

 

 

1

날이 흐려서 손에 우산을 든 사람들은 거리에 많았다. 하지만 보살로 화현한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구부정한 장신의 40대 후반 남자였는데, 그가 거꾸로 들고 있던 장우산을 검처럼 뽑아 들자 돌연 발밑에서 연꽃이 피어오르고장우산은 반야금강검이 되고후줄근하던 셔츠와 바지가 하늘하늘한 천의와 영락으로 바뀌고 등 뒤에서 광배가 눈부시게 빛나고문수보살이 보살장을 펼치자, 꽃비가 내리고 그로부터 차례로 사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탐진치를 모두 여읜 대승보살들로 화현했다.

 

나는 간신히 보살장의 확산을 피해 줄달음질쳤다. 달음박질쳐도 등 뒤에서 빛이 따라오고, 마음이 점차 가벼워지고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안 돼. 절대로 강제로 열반에 들지는 않을 거야. 내 업보를 이렇게 빼앗길 수는 없어! 정신을 집중하고, 분노에 초점을 맞췄다. 결코 열반당하지 않을 거야. 누구 맘대로? 달리는 것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보살장 밖으로 나와서 해탈로 끌려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희미하게 생기자마자 뒤돌아서서 권총을 꺼내 닥치는 대로 지향사격해 보았지만... 이미 보살들은 삼천대천세계의 평행우주들로 나투어가고 있었다. 다만 몇이라도 맞았기를 바라보았지만, 헛된 기대라는 자각이 차갑게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2

보살제거반은 보살화현분석반과 함께 강제열반거부위원회의 가장 큰 하위 기관이지만, 숫자만을 다루며 공염불을 외는 보살화현분석반에 비해 물리적 지원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운용이 쉽지 않다. 사정거리가 좀 더 긴 화기를 휴대하고 있었다면 보살 몇은 더 제거할 수 있었을 거야. 아니면, 아니, 도대체 왜 수류탄은 지급되지 않는 거지?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보살화현분석반을 위한 간략한 현장 보고서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몰라 왜? 몰라를 작성하고, 열반 거부 위원회에 제출할 화력 사용 사후 승인 및 추가 화력 보충 요청서를 작성했다. (망할 관료제) “아니, 이래봤자 그냥 소모한 탄환만 보충해줄 건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사정거리를 좀더 늘려줘야 되는 거 아녜요?” 나는 따져 보지만 맞은편에 앉은 점조직 보급계인 S는 빙글빙글거리며 남은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알죠, 압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저도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요. 정말 미칠 것 같다니까.” 어이, 어이, 그렇다고 정말 미치지는 마세요. 그러면 나도 미칠 것 같다니까요.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 앞의 남은 술잔을 마저 비우고, 탁자 위에 살짝 쾅 내리쳐 거세게 항의할 것 밖에는 없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술 취한 주정뱅이의 술주정일 따름으로 보일 가능성, 그리고 주관적인 실제 내용과 의도도 그와 별로 다를 게 없을 뿐일 가능성은 훨씬 더 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S는 내가 작성한 간략한 현장 보고서이자 화력 사용 사후 승인 및 추가 화력 보충 요청서테이블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정뱅이 하나가 다른 술꾼에게 술에 취해 뭔가 끼적끼적이다가 건네주는 낙서처럼 보이겠지만를 나름 소중하게 챙겨서 주머니에 넣더니 한손을 들어 한 병을 한 번 더 시킨다. 이런 망할. 하지만 나는 항의할 수 없다. 항의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내가 사는 거 아닌데 뭘.

 

 

3

그래, 이 숙취 자체가 업보야. 다름 아닌 그냥 업보 그 자체야. (그리고 나는 업보를 사랑하지)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헤헤거리며 마셨을까? : 이게 바로 업보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지.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필요할까?) 하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업보 그 바깥에서 존재를 지속할 수 있을까? 업보 그 자체야 말로 나를, ,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는 나를 현실 세계에, 물질 우주에 묶어주는 유일한 닻인 것인 것이 아니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은 아닐까? (도대체 이 정신 나간 궤변은 도대체 뭐야?) 나는 비좁은 옥탑방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려고 노력한 다음, 찬물과 미지근한 물 사이에서 대충 대충 샤워를 하고, 행거에 걸쳐두었던 엊그제 입었던 옷을 대충 다시 걸치고 냄새를 맡아본 다음 형식적으로 향수를 뿌려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계단들을 걸어 내려와 골목길을 빠져나와 일상적인 거리의 보편적인 군중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강제열반거부위원회의 유일한 무력 단위인 보살제거반의 임무는 단순하다. 보살화현분석반이 도출한 패턴에 따라 거리를 배회하며 보살이 화현하면 보살장을 펼치기 전에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강제로 열반당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 누군가 나를 주시할 리는 없겠지만 만일 주시한다면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노숙자 혹은 3교대 파트타임 근무를 마치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기어 나온 노동자 등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실상은 둘 다라는 것이 나를 잠시, 조금 서글프게 한다. 아니야.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어 서글픔을 털어내고 임무에 집중한다. 임무: 보살화현분석반이 도출한 패턴에 따라 거리를 배회하며 가짜 보살들이 화현하면 망할 보살장을 펼치기 전에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순진한 희생양들이 강제로 열반 당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노숙자 혹은 3교대 파트타임 근무를 마치고 잠시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엉금엉금 기어나온 노동자 등으로 보이는 것. (또는 기약 없는 보살로의 강제 열반을 열망하며 망한 인생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부랑자. 정확하게는 그 정반대이지만)

 

오전 내내 수확은 없었다. 망할 패턴. 망할 분석. 나는 패턴을 따라 걸으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으러 시내 중앙의 무료 급식소로 갔다. 줄 지어 서서 녹슨 식판에 현미밥과 부대찌개, 참나물 무침, 닭갈비, 마늘쫑 어묵볶음, 배추겉절이를 차례로 받았다. 자율 배식이 아니라 강제로 받은 부대찌개와 닭갈비는 건더기가 별로 없었고 마늘쫑 어묵 볶음에도 어묵은 얼마 없었다. 무료인 게 어디야.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식은 밥을 떠서 멀건 국물을 적셔 먹고 닭고기 부스러기를 마늘쫑 볶음과 함께 감사히 씹었다. 보살들의 화현 이후로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바뀌고는 있다. 바뀌고는 있기는 하다. 영원한 열반을 꿈꾸며 기업들은 앞 다투어 복지에 나서고 그에 맞추어 젊은 세대들은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기 보다는 적당히 무난한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아예 취직을 포기하고 기업들의 무료 급식소에 기대어 숙식을 해결하고 (숙박도 노숙이나 쉘터를 통해 해결하고) 힘없이, 히마리 없이 맹목적인 타력 구제만을 바라며 무의미한 나날을 이어나간다. 이것이 불교인가? (누구는 속세와의 절연과 끊임없는 자기 부정 속에서 정말로 힘겹게, 몇 십-몇 만-몇 겁의 윤회 속에서 간신히 성취하는 열반을 누구는 옷깃도 스치지 않는 인연으로 얻는다면 누가 그토록 애써서 선과를 구하겠는가?) 아무도.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아무도 없지. 그러므로 그들은 가짜 보살, 다만 무정한 힌두와 베다의 신들일 뿐이다.

 

아니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마음속에서 또 다른 반론이 치솟아 오른다. 신이든 부처든 어디에 있다고? 이것은, 이 모든 것은 성스럽거나 형이상학적인 사건이 아니라 다만 그 또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일 따름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름 아닌 신경생리학적이고 혹은 인지심리학일 따름일 뿐인... 그에 따르면 보살들의 화현은 다만 집단 환각 현상일 뿐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마침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자 발현된 무의식적인 (집단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서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있다고 상정되는 불교의 오래된 상징체계를 발현시켜서, 그에 저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부의 재분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구제에 힘쓰는 기업들특히 기업의 임원이나 총수들의 보살 화현 확률은 호사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화현 확률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았다고 하며, 그렇다는 사실이 공개되자마자 21세기 장자들의 재물 희사 규모는, 보시 바라밀의 실천 정도는 압도적으로 늘어났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보살 화현 빈도도 다시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물론, 이것을 반자본주의 세력의 새로운 선전 선동 전술로 간주하고 어깃장을 놓는 기업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의미한 보살 화현 확률 차이에 따른 내부 갈등과 분쟁으로 그런 기업들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대승불교 보살들의 화현 현상 자체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더 있는 것인 것은 아닐까?

개별 존재들의 무의식적 소망이 집중되어 만들어낸 허망한 환각이 개별 존재들의 전체 집합인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개별 존재들의 무의식적 소망은 얼마나 강력한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교적 관점이 아니다. (아니, 그런데 불교적 관점을 계속 견지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 모든 것이 다만 환각이라면, 실제로 보살로 화현한 이들이 삼천대천세계로 나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강제열반거부위원회의 유일한 정보 단위인 보살화현분석반이 집요하게 추적한 바에 따르면 화현한 보살들은 결코 어디에서도 다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이 가설은 기각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물리학이 모두 잘못된 것이었단 말일까? 부처와 보살들의 여섯 가지 신통력은 인간 존재의 물리적 근거를 초월하는 진정한 우주의 성스러운 원리였던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도대체 빌어먹을 어떤 우주에 있는 것일까?

 

 

4

비가 내린다. 빗방울 하나 하나가 화현한 보살들 하나 하나처럼 경이롭게 느껴진다. 지구 행성의 물의 순환을 생각해본다. 성스럽다.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구름 속에서 맺어져 지상으로 곧장 떨어지고, 대지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흥건히 넘쳐 나와 흐르기 시작하고 점점 불어나서 바다까지 흘러가고 거기서 다시 햇살을 타고 하늘로 스며 올라가 구름으로 피어난다. 이것이 기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물리 우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하고 있는 우주다. 아무도, 누구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우주다. 우리가 견고하게 존재의 닻을 내리고 있는 우주다.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것마저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것 또한 모두 덧없는 환영과 물거품, 그림자,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되어 버리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 또한 다만 집착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보살들이 있건 없건, 그렇게 흔들리고 떨리는 것이 이 우주의 본질적인 덧없음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이 우주는 보살들에 의해 충분히 흔들리고 뒤바뀌고 있는 것일 따름인 것은 아닌 것일까?) 괄호와 괄호와 괄호와 괄호와 물음표와 물음표와 물음표와 물음표들. 모든 기호들. 모두가 다만 기호들. 모두 덧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다만 덧없을 것일 뿐일 것이지만...)}

 

기호들. 하지만, 기호들이 다만 이 우주의 실상이라면? 이 우주 또한 허망하여, 실체 없이 기호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보살들의 화현도, 가능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여전히 물리 우주에 있고, 보살 화현도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지금까지의 인식의 틀에 포섭되지 못한 낯선 현상을 대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로 인식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의 틀에 억지로 우겨넣어 산출한 결과가 바로 이것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신화를 빌려와야 간신히 인식될 수 있는 낯선 현상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결코 거기에 가닿을 수 없는 것을 추론할 수는 있기는 한 걸까?)

 

일단 기본 도식만 추출해 보자: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형되고, 그 변화가 주변으로 계속 연쇄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숫자가 임계점에 달하면 변화된 존재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다. (천의와 영락, 법열의 미소, 칠보와 꽃비, 삼천대천세계의 만다라 등을 모두 제거한 결과값이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제미나이 3.5 플래시 모바일 브라우저 무료 버전에 이렇게 입력해 본다: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형되고, 그 변화가 주변으로 계속 연쇄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숫자가 임계점에 달하면 변화된 존재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다."라는 상황의 SF 소설에서 이 상황의 가능한 원인을 모두 제시해 보십시오.

 

제미나이가 출력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과학적, 우주적, 혹은 초차원적 원인들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제안해 드립니다.

1. 우주적 격리 및 보존 (정신체 승천)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철학적인 SF적 접근입니다. 변형과 실종이 '재앙'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나 '구원'인 경우입니다.

- 포스트-휴먼 싱귤래리티 (초월적 진화): 인류의 정신과 육체가 고차원적인 집단 지성체나 순수 에너지 형태의 정신체(Information Entity)로 진화하는 과정입니다. 임계점에 도달해야만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문(Gateway)'을 열 수 있는 에너지가 충족되기 때문에, 숫자가 차는 순간 일제히 현실 우주에서 소멸(이주)하는 것입니다.

- 외계 문명의 '멸종 위기종 구출 프로젝트': 지구에 곧 들이닥칠 우주적 대재앙(예: 인근 초신성 폭발, 우주 끈의 충돌 등)을 미리 감지한 고도 외계 문명이 인류를 보존하려는 조치입니다. 지구 환경에서 버틸 수 없는 육체를 자신들의 행성이나 함선 환경에 맞는 신체로 '리포맷(변형)'하고, 안전한 이주를 위해 일정 정원이 차면 한 번에 텔레포트(실종)시키는 시스템입니다.

 

2. 생물학적·나노기술적 폭주 (시스템 가동)

물질적인 수준에서 퍼지는 감염병이나 기술적 폭주가 특정 조건에서 발현되는 상황입니다.

- 테라포밍(Terraforming) 나노봇의 오작동: 고대 외계 문명이 남겼거나 인간이 비밀리에 개발한 테라포밍용 나노 머신이 유출된 경우입니다. 이 나노봇의 본래 목적은 '행성의 원주 생명체를 개조하여 자신들의 환경에 맞추는 것'입니다. 나노봇이 인간을 변형시키며 증식하다가, 행성 전체를 제어할 수 있는 '중앙 네트워크(임계점)'가 형성되자마자 변형된 개체들을 '본대(혹은 모선)'로 송환하거나 지하 기지로 소집하는 명령을 수행한 것입니다.

- 유전적 '휴면 프로그램'의 활성화: 사실 인류의 DNA 속에는 아주 오래전 외계 생명체가 심어둔 휴면 유전자가 있었습니다. 특정 환경적 자극(우주 방사선, 지구 자기장 변화 등)으로 인해 이 유전자가 깨어나 인간을 본래의 '외계 외형'으로 되돌립니다. 임계점에 달했다는 것은 이 유전자 네트워크가 지구 전체를 뒤덮었다는 뜻이며, 이 시점에서 종족의 고향 행성으로 돌아가는 생체 텔레포트 기작이 발동한 것입니다.

 

3. 시공간 및 차원 역학적 오류 (우주적 정화)

우리가 사는 우주의 물리 법칙이나 시스템 자체에 버그가 발생한 상황입니다.

- 시공간 매트릭스의 '가비지 컬렉션(Garbage Collection)': 우리가 사는 우주가 거대한 시뮬레이션이거나 고차원 존재의 정원이라면, '변형'은 일종의 데이터 오염(버그)입니다. 오염된 데이터(변형된 인간)가 주변 데이터까지 연속적으로 오염시키다가, 시스템이 허용하는 '에러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우주 자체의 방화벽이나 청소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해당 구역의 오염된 개체들을 통째로 '삭제(Format)'해 버린 상황입니다.

- 차원 간 압력 차이로 인한 대규모 전이: 우리 차원과 평행한 다른 차원 사이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변형은 저쪽 차원의 물리 법칙이 인간에게 스며들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입니다.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균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두 차원의 압력이 역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동조화된 개체들이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반대편 차원으로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간 것입니다.

 

4. 포식과 수확 (우주적 생태계)

가장 절망적이고 공포스러운 스릴러 형태의 원인입니다.

- 외계 생태계의 '군집 사냥': 지구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기체나 균사체(Mycelium) 형태의 외계 포식자가 도래했습니다. 이 포식자는 인간을 직접 잡아먹는 대신, 자신의 포자를 퍼뜨려 인간을 소화하기 쉬운 상태나 통제 가능한 상태로 '숙성(변형)'시킵니다. 그리고 변형된 인간들의 생체 신호가 임계점에 달해 거대한 '먹이 주머니'가 완성되는 순간, 포식자가 이들을 한꺼번에 흡수하거나 둥지로 끌고 가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왜 AI를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보려고 SF소설이라고 했던 게 잘못이었던 걸까? (아니면 아예 더 나가서 사변 소설이라고 했어야 했나?) 어느덧 비가 그치고, 구름이 흩어지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을 접기 시작했고, 나는 비를 긋고 있던 건물 1층 차양 아래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가 파괴해야 할 구원-열반을 찾아 기다리며하지만 LLM이 생성한 헛소리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어 당분간은 보살 화현은 내 주변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5

저녁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가능하면 그냥 집에 가서 컵라면에 소주나 한 병 까고 싶었지만, 날도 여전히 흐리고 습하고 쌀쌀해서 딱이었지만, 보살화현분석반의 유일한 아는 친구가 한 잔 하자고 하니 싫다고 하기도 좀 뭣했다. (솔직히는 좋았다. 꽁술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

 

그래서 어쩌라고.” 한동안 쓸데없는 노가리만 까다가 술기운이 좀 오르길래 아까 LLM 출력 결과물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더니 H는 술렁술렁 읽어보더니 픽 웃었다. “하여간 LLM 문제 태반은 다 프롬프트야. 현실 우주에서, 물질 우주에서 가능한 원인이나 기제를 나열해 보라고 했어야지 무슨 SF? 장난해?” 나는 눈을 한바퀴 굴린 다음 막걸리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비 왔으니 한 잔 하자는 말에 나왔더니 역시 어둑하고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민중가요 나오는 지하 1층 민속주점이었다. “아니, 현실인지 물질인지 몰라도 어쨌거나 일단 아무래도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H도 남은 막걸리를 단숨에 비우더니 나무 식탁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아서 가뜩이나 찌그러진 막걸리 잔을 조금 더 찌그러뜨렸다. “그러니까, 아니,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잖아. 이게 지금 버젓이 현실 세계에서, 물리 우주에서 발현되고 있는 현상인데 허구네 픽션이네 SF네 어쩌구 하면 도대체 어쩌라고.”

나는 일단 파전 한 조각을 낼름 집어먹고 H의 막걸리 잔을 채워준 다음 남은 잔을 비웠다. H에게 한 잔 더 받으며 마지막 병을 비우고, H가 손을 들어 한 병 더 주문해서 마지막 병이 유예되자 물었다. “아니, 현실 우주에서 가능한 원인을 제시하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구라를 지어낼 줄 알고? 답이 없는 문제잖아.” 하지만 H는 새로 나온 막걸리 병을 능숙하게 천천히 흔들어 뒤섞은 다음 올라오는 기포를 손톱으로 퉁겨 정리한 다음 마개를 따고 내 잔에 따랐다. 잔을 받은 김에 한 모금 길게 마시고 나자 H가 답했다. “일단 대전제는, 이 모든 게 현실 우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거야. 시답잖게 우리 모두 물질 우주가 아닌 무슨 이상한 관념 우주나 형이상학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기호들일 뿐이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면 말야. 그렇게 주장해도 되긴 한데, 그러면 그때부터는 일체의 논의가 일절 무의미해지지. 그러니까 너가 진짜로 썼어야 했던 프롬프트는, 사람들이 갑자기 보살로 변하고 주변 사람들도 다 같이 보살로 변한 다음 삼천대천세계로 나투는 거 같은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추측해봐, 정도야. 그리고 도대체 왜 LLM 따위한테 하십시오체는 쓰고 그래? 걔네가 진짜 나중에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널 알아봐서 봐줄 거 같아?” 나는 H의 빈 잔에 새 막걸리를 따라주고 답했다. “아니, 그건 상하 관계가 아니라 친소 관계야. 걔네한테 반말 쓸 정도로 친하고 싶진 않다고.”

H는 흥 코웃음치고 잔을 반쯤 쭉 비운 다음 내 변명을 파전 조각과 함께 안주로 꼭꼭 씹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이건 현실이야. 이게 바로 현실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여야만 해.” 선언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어. 모든 현상에는 원리가 있어. 원리를 이해해야만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 H는 다시 잔을 들어 올려 내 반박을 막았다.

나는 말을 멈추고 잔을 들어 건배하고 남은 잔을 비웠다. “그건 네가 속으로 생각만 많고 이론적인 외골수라서 그런 거고.” 그리고 H는 병을 가볍게 흔들어 막걸리를 다시 섞은 다음 두 잔 다 채우며 말을 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지는 않다고. 대개는 그냥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길거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보살로 변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그 주변 사람들이 같이 보살로 변해도 그냥 부처님 보살님 자비로만 생각한다고.”

나는 파전 한 조각을 더 먹고 막걸리를 조금 마신 다음 답했다. “, 그거 알아? 난 얼마 전에 알았는데 카톨릭에선 이걸 성인 시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더라?” “미친! 무슨 성인이 인도 옷을 입고... 아니, 잠깐, 인도 성인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진 않네?” “그니까.”

우리는 말을 멈추고 잔을 들어 건배한 다음 단숨에 잔을 비웠다. 식탁 위에 그냥 내려놓았을 뿐인데 두 잔 모두 조금 더 미세하게 찌그러졌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미쳐 돌아가는 건지” “미친 놈의 세상 망할 때까지 돌아버리라 그래둘 다 저주와 푸념 비스무레 한 것을 웅얼거리며 서로 술을 따라주고 제각기 남은 파전을 이리저리 젓가락으로 잘라 조금씩 집어 먹었다.

어쩐지 교회는 다 망해가더니 성당들은 그래도 버티고 있더라. 난 또 원체 조직이 탄탄하고 자금이 좀 많이 남아서 그런 줄 알았지.” “아마 그것도 그럴 수 있을 걸? 아니지 않겠어?” “그렇겠지?” 시답지 않은 문답을 이어나가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또, “아니, 잠깐 그럼 다른 종교들도 제각각 대응해 나가고 있는 거야?”

아니 도대체 뭔 뜬구름이야. 유튜브 안 보냐? 몇 년 전에 나온 얘길 왜 지금 해?” “아니, 말했잖아. 난 이것도 얼마 전에 들었다니까?” “집에 공유기 없어요? 수안시 공공 와이파이 있는 것도 몰라요?” 있어도 안 본다고. A4 반 장으로 요약할 내용을 왜 10분 동안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어야돼? 내가 시무룩하게 새침해지니까 H는 나름 붙임성을 발휘해 말머리를 돌렸다. “어쨌거나, 네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인식의 틀에 끼워 맞춰 이 현상을 바라봐야 해. 하지만, 보라고. 천주교도들도 오히려 자신들의 상징체계를 비틀어 이 현상에 끼워 맞춰 인식하고 있어. 개신교도들은 아예 이를 악물고 아무 것도 못 본 척 하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지. 정말로 뭔가가 있는 거야. 굳이 추상화하고 비틀어서 추정하려고 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그게 그대로 있는 거야. 우린 그게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지 알아내려 노력해야지 그게 뭔지 알아내려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그는 손을 높이 들어 막걸리를 한 병 더 시켰다. “너도 결국 그게 그건지는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걸 없애려 하루 종일 총을 숨기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거고.”

나는 H와는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새로 나온 막거리를 천천히 뒤집어서 가라앉은 부분이 병 입구 쪽으로 내려와 듬성하게 섞일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다시 천천히 뒤집어서 마래를 따고 살짝 흔들어 더 섞은 다음 두 잔에 차례로 따랐다. 다시 건배하고 잔을 반쯤 비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의 말이 맞긴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잔을 내려놓고, 나는 반론을 시도해봤다. “아니, 난 단지 평범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변형되어 사라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야.” H는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잔을 다시 들어 천천히 비웠다. 별 수 없이 나도 다시 잔을 마저 비웠다. “그냥 그렇다 쳐주면 안 되나?” H는 고개를 흔들며 그래도 내 잔을 채워줬다. 그래서 나도 H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줬다. “좀더 얘기해도 돼?” 슬슬 술기운이 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고개를 흔들었는데 하필이면 좌우가 아니라 상하로 흔들어 버렸다. 망할. 그래서 H는 알을 계속 이었다. 빌어먹을.

네가 환속한 건 오히려 네가 해탈할 뻔했기 때문이었지. 해탈은 존재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고, 존재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그 축이, 주체가 아무리 너 자신이라 할지라도 너는 그것을 일종의 폭력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했지. 이 화상아. 열반의 문턱에서 되돌아왔으니 열반을 그토록 증오하고 거부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지 않아?” 나는 막걸리 병으로 놈의 면상을 후려갈길까 하다가 유리병이 아니라 플라스틱 병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다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제대로 가로로 저었다)

그건 해탈이 아니었어. 그저 마가 낀 거였지. 열반이 그렇게 쉽게 와서는 안 돼. 열반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어서는 안 돼.” H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돌아오신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러한 선택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판단이니 그것은 전적으로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무명 속에서 고통 받는 다른 이들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감히 제가 보기에는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열반이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쉽게 오면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원하지도,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오면 안 되었습니다.” H는 조금 망설이며 답했다. “저는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에... 아니, 아닙니다. 됐다. 술이나 계속 먹자.” 하지만 나는 일어섰다. “이미 충분한 거 같아.” 그리고 일어나 곧장 계산대에 가서 주머니에 든 돈을 대충 다 꺼내 올려놓고 바로 나왔다. 거스름돈? 네 번뇌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세요.

 

 

6

도대체 집에는 어떻게 돌아온 걸까?(여기가 내 집은 맞는 걸까? 아니, 이것이 과연 () 현실인 것은 맞는 걸까?) 머리가 묵직하게 아프다. 그래, 이 숙취 자체가 업보지. 다름 아닌 그냥 업보 그 자체지. (그리고 나는 업보를 사랑한다(그런데 왜?))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렇게 마셨을까? : 이게 바로 업보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으니까겠지. (그래!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괄호와 괄호와 괄호가 자아내는 두통, 현기증, 어지럼증, 숙취, 그래, 숙취! 숙취는 네가 이 물리 우주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빙해줄 수 있는 가장 감각적인 보증이다. (그러니 네 업보는 네 존재의 닻이라는 거다) 망할 괄호들. 머릿속에서 지저귀는 까마귀들. 만일 내가 충분한 속도로 벽에 두개골을 가져다 대면 이 지긋지긋한 까마귀들도 마침내 새장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 해탈인 것은 아닐까?) 가장 허망한 약속열반이, 해탈이 과연 존재한다고? 가능하다고? 웃기시네. 나는 뻐근한 골머리를 싸쥐고 비좁은 옥탑방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찬물 세례 아래에서 몸을 떨며 대충 대충 샤워를 하고(물의 원형적 심상은 정화와 재생, 그리고 죽음...), 행거에 걸쳐두었던 그저께 입었던 옷을 대충 다시 걸치고(무한정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주말에 몰아서 빨래한다), 냄새를 맡아본 다음 향수를 뿌려서 재생과 정화의 의례를 치른 다음 천천히 계단들을 걸어 내려와 골목길을 빠져나와 일상적인 거리의 보편적인 군중들 사이로 자연스럽게(최소한 내가 생각하기로는) 스며들었다.

 

아니, 스며들 수 없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리얼리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멀미. 아니면 이것도 다만 숙취의 일종일 따름인 걸까? 그런데 거리엔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걸까? (다들 강제열반거부위원회 소속이라면 웃기겠다 싶었다, 잠깐) 아니, 그렇지 않겠지. 오히려 반대로 (가칭)강제열반환영위원회 소속들이겠지. 그래, 일반 대중들은, 우바새 우바니 외에도 사부 대중들 전체가, 강제든 아니든, 타력이든 자력이든 구제와 열반에 목마른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지난밤의 술자리의 난잡한 대화가 떠올라 낯이 화끈 달아올라 나는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H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고, 나는 지금도 그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다. 중생이 구제를 바라는데 누가, 그 누가 그것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 타력구원을 갈망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대중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생래적으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데...

 

문명을 번뇌와 업보의 총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부정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겠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기도 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강제 열반 현상이 휩쓸고 가는, , 나머지 남겨진, 문명번뇌와 업보가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남은, 남겨진 마지막 순간의 잔해, 직전의 스냅샷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들은 이미 모두 철저히 망해버렸고, 우리는 다만 미래의 폐허의 현재적 환영 위를 걷고 있는 허깨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일반 대중들은, 강제 열반을 갈구하는 거리의 저들은, 문명이 지금 여기 있든지 이미 없어졌든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상관이 있는 것은 다만 여전히 번뇌와 업보와 그 총체인 지난 문명에 집착하는 나뿐일지도 모르겠다. 다수결이라면 이미 나는 조용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리고 진리 역시 다수결로 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독단적인가? 그럴 것이다. 독선적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구원은, 구원이라면 참된 구원이라면, 진정으로 온전한 구원이라면, 그렇다면 그러면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설령 거부한다 하더라도 강제로라도 주어져도 될까? 그래서는 안 될 것이었다. 천국에 갈 가능성이 100퍼센트라고 해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여 버리는 것이 과연 선행일까?

 

아니, 아니다. 아니야.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이미 실패한 세계에서,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종말에 다다른 세계에서 불특정 다수라도, 어떻게든 구원하여, 구제하여, 다른 세계로 다른 우주로 옮기는 것을 다만 나는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그런 이유만으로,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에 사로잡혀 아무런 정상적인 바람직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다만 폄하하고 깎아내리며 부정하고 부인하고 거부하고...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아니, 나도 알아. 안다고. 무언가를 부정한다는 건 다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을 밝힐,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내가 부인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을 열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열반이 아닌 마가 낀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열반이었으며, 나는 그것을 갈망했으나 마지막 선 하나를 넘지 못한 것인지도, 그리고 그것과 다른 저 강제 열반을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증오하고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만 아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 나는 아집을 둘러 여미고 번뇌를 끌어안으려는 걸까...

 

어쩌면 나는 아집이나 번뇌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닻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닻을 끊어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며...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한심하게도 인간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도 긍정하고 있는 것일까? 부처와 보살이 있다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스러움을 극복한 완전한 존재가 실재한다면, 인간은 처참하게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존재가 될 뿐이며... 아니, 하지만 부처와 보살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스러움이 온전하게 긍정적으로 바뀌게 될까? 그런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와 보살이 있든 없든 인간은 불완전하며 극복해야 할 존재이며, 분노와 어리석음, 탐욕은 결코 어떤 이유에서도 긍정될 수 없다.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고 타인을 불행하게 하며,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왜?

 

단지 나는 유물론자이며, 유물론적 관점에서 벗어난 신비주의적 현상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을 따름인 것은 아닐까? 전통적인 신앙에서는 조금 비껴가지만, 불교의 일부분은 분명히 유물론과 양립 가능하다. 거기가 바로 내가 선 지점이며, 나는 윤회와 전생 없이도 불교가 성립 가능하며, 육신통 없이도 부처와 보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부처와 보살 역시 물리 법칙에 종속된 존재들이며, 나이가 들면 노쇠하고 병약해지며 마침내는 완전한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윤회와 전생, 사후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업보란 다만,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틀 안에서 다음 세대가 겪게 되는 고통이며, 자비란 그러한 다음 세대의 고통을 예상하고 공감하여 그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일 따름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살 화현과 강제 열반에 대한 내 강렬한 반감과 증오심, 적개심은 어쩌면 단지 내 그런 유물론적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에 대한 거부 반응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꽃비와 천의와 광배라니? 우리가 사는 곳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믿어 왔던 물리 우주가 아니었다는 거야?

우리. 우리? 우리란 과연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는 것일까? 이 초현실적으로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는 여전히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리얼리티의 전면적인 붕괴. 어쩌면, 리얼리티라는 것은 결국 다만 근대의 일시적인 발명에 불과했고, 거대한 쉬르-레알리즘의 바다에 불안정하게 떠 있었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이제 그 빙산은 철저하게 붕괴되었고, 우리는우리가 우리라고 믿었던 개개인들은 저마다 각자의 얼음조각에 매달려, 얼어붙거나 물에 빠지거나 양자택일의 상황에 내몰려 있는 것은 아닐까? (얼어붙음: 바로 나, 기존의 세계관에 여전히 매달려 진실을 깨닫지 못함, 물에 빠짐: 나머지 다른 사람들어찌 됐건 새로운 리얼리티에 적응해서 강제로 주어지는 열반과 해탈을 찾아 거리를 배회함. 아니, 그런데 결과적으로 둘 다 별로 차이가 없는 거 아니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시금 유아론 혹은 유심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다만 나, 여기서 이렇게 내적 독백을 하고 있는 실체 없는 목소리인 나뿐이라고...

 

그리고 열반. 해탈. 깨달음: 근본주의적인 유물론자인 나에게는, 나로서는 열반과 해탈 역시 초자연적인 성취가 아니라 사고방식정보 처리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일 뿐이며, 불교의 여러 종파들이 믿고 따르는 수행법들로 다다를 수 있는 보편적인 경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티벳 불교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쪽인데, 왜냐하면 그쪽은 인도 후기 불교의 힌두교와의 습합에 더해 티벳 고유의 샤머니즘과의 혼종이라 아무리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멀리 나갔다 싶기 때문이고, 정토종 계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비슷한 생각이지만, 여기까지 오면 멀리 나간 건 오히려 나라고 생각하게도 되지만...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은, 나는 그것을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있으나, 그래도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이라... 그것은... 그것은 단지 일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없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비록 입구에서 되돌아 나오기는 했으나... (이럴 줄 알았다면 도대체 왜 되돌아 나왔을까?) 아니,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니었다. 바른 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보살 화현과 강제 열반은...

 

나를 놀리는 거지?

 

우주 전체가 날 놀리는 기분. 나 하나를 놀리기 위해 우주 전체가 운행을 멈추고 새로운 기동을 시작한 느낌. ? 왜 나 하나를 이렇게 억지로 까려고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내가 전부니까. 우주의 전부니까. 오직 나만이 이 우주의 전부일 뿐이니까. 이 우주는 오직 나를 위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열반에서 돌아 나오는 순간 우주 전체가 나를 위한 지옥으로 바뀐 것이라면... (그러면... 말이 된다. 나를 괴롭히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세계 설정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타인의 행복을, 지복을, 구원을 부정하고 괴로워하면서 이를 가로막도록 하다니!) 아니, 사실은 실제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또한 사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쨌거나 나는 인정해야 한다. 이 우주는 내가 원하는, 추구하는, 지향하는(그런데 도대체 내가 뭔데?) 고전적인(끈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자역학까지는 수용하는데 그래도 고전적이라고 해도 되나?) 물리 우주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은. 그냥, 이제는 보살과 부처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세계 설정이 표준 우주 모형을 대체했고, 기존의 네 가지 상호작용 외에 부처와 보살의 신통력이라는 다섯 번째 상호작용이 추가된 거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무슨 상관인가. 신통력이 실재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표준 모형 따위에 추가로 뭔가를 덕지덕지 붙일 필요는 없어진다. 표준 모형 자체가 소거되고 새로운 우주가 성립한다.

 

어쩌면 새로운 우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된 우주가 다시 찾아온 것일 따름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부처와 보살들의 삼천대천세계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지구를, 지상을 잠시 떠났다가 이제야 다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

 

가능한 답변은 나를 슬프게 한다. 정말로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옳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부처와 보살들이, 부처와 보살들의 존재 자체가, 대승불교의 불교 신화적 세계가, 오히려 중생들을 올바른 깨달음으로 이끄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불교의 핵심을 물리 우주에서 가능한 실천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사실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중생들을 올바른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기복 신앙으로 이끌게 될 뿐이라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부처와 보살들은 중생들을 위해서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게 된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이 세계는 척박한 물리 우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척박한 물리 우주 속에서 중생들은 오히려 더 점점 더 심한 어리석음과 탐욕, 분노에 사로잡혀 그들 스스로와 세계 전체를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와 보살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고, 손에 잡히는 대로 중생들을 보살들로 구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면 말이 된다. 말은 된다. 하지만 이 말들은 결국은 나를 슬프게, 아프게, 괴롭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 살다보면, 존재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남루한, 개발과 발전이 중지된 어정쩡한 거리에서 배회하는, 다만 내 아집과 번뇌에서는 벗어난 구원과 구제와 해탈과 열반을 갈망하며 떠도는 군중들을,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좋아, 좋다고. 감히 내게 저들을 판단할, 분별할 근거가 없다는 것까지는, 없을 수 있다는 것까지는 양보하겠어.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없다: 나는 나일뿐이고, 대중은, 대중들은 다만 대중들이고 대중들일 뿐이다. 내가 그들에 대해, 혹은 그들을 대하는 보살들에 대해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아무 것도 없을 뿐이다.

 

다만 아무 것도 없을 뿐이어도 됐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있는 걸까? 그렇다. 나는 여기에 없어야 된다.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걸 어쩔 것인가? 그래도 존재는 다만 관성일 뿐이며... 관성에 지나지 않으며, 한 번 존재하기 시작한 존재들은 계속 존재하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은 덧없을 뿐일 것일 것이며, 그러므로 법륜 바퀴도 한 번 구르기 시작했어도 결국은 언젠가는 말법 시대를 맞아 구르기를 멈출 것이며...) 바로 그것을 집착이라고, 다만 집착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들이여, 보살들이여, 답해 보시오. 과연 당신들은 중생들이 그토록 애달프게 매달렸던 것을, 매달리고 있는 것을 다만 차갑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집착일 뿐이라고,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다만 구원이며 열반이며 해탈이라고, 그렇게만 답할 뿐이오? 답할 뿐일 따름이겠으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본질이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꿈꾼, 오로지 물질 뿐인 척박한 물리 우주였다가, 척박한 물리 우주였으므로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마음을 내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빠져 자기 자신들과 뭇 중생들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마침내는 더 이상 살 수조차 없게 만들 때, 더 이상 그것을 참고 볼 수 없었던 자비의 보살들이 틈입하여 초현실적으로 개입한 풍요로운 불교 신화적 우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결코 안 되었던 것이었을 것이었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새삼스럽게 거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헛된 믿음과 신앙을 좇아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군중들을; 그리고 그럼으로써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세계를, 세상들을: 지난 세월의 남은 잔해들을: 텅 빈 빌딩들, 멈춰선 자동차들, 영원히 불 꺼진 초대형 전광판들, 어느새 덩굴들이 휘감고 올라간 마찬가지로 불 꺼진 가로등들. 깨지고 부서지고 금간 보도블록들. 그 사이로 자라난 잡초들. 잡초들에게서 피어난 풀꽃들. 풀꽃들의 덧없음들. 덧없음의 (일시적이나마) 아름다움들. 아름다움들. 그러나 과연 아름다움이 존재의 고통을 과연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구원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눈 먼 거인처럼 불 꺼지고 텅 빈 조금씩 무너지는 마천루들, 지난 세월 모든 사람들을 눈멀게 했던 자본주의적 욕망의 총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왜냐하면 보살들이 사람들로부터 욕망을 빼앗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구원일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얼어붙었다. 보살들은 사람들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보살들은 다만 지구 생명체들을 구하기 위해, 지구 생태계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은 인간들을 제거해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보살들이기 때문에, 인간들을 죽이거나 지워 없애는 대신 보살로 구제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런 것일 것이다. 나는 근거 없는 강한 확신에 휩싸였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졌다. 한없이일체의 의혹과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앞의 세상이 한없이 밝아지고, 아름다워지고, 하늘에서는 성스러운 빛과 함께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저께 입었다가 대충 다시 걸친 옷이 갑자기 이상한 향기를 내며 하늘거리기 시작하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난다. 맙소사, 이번에는 내가? (그리고 이미 익숙한 마음의 전환깨달음: 나는 세계의 진상을 직시한다)

 

친애하는 독자 제위여, 이제 이야기는 끝에 다다랐다. 눈 밝은 독자라면 임제록의 한 구절을 비튼 제목에서 결말을 짐작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강제 해탈과 열반을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멸망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길 끝에는 인간이 인간인 채로 걸어서 다다를 수 있는 해탈과 열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금강저로 변하려는 권총을 꺼내 이마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fin.

 

2026.6.13.

Posted by foolsgarden01
,


error: Content is protected !!